사회과학의 상징적 교섭론, 허버트 블루머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분석

 

상징적 교섭론이라는 말은 언뜻 추상적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김춘수의 <꽃>을 토대로 상징적 교섭론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 즉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없었을 때는, 이들의 관계는 “하나의 몸짓”이라는 ‘비상징적 교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각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즉, 두 사람은 하나의 “꽃”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혹은 이런 경우도 있다. 군 복무 시절 내 군화는 어떤 존재였는가? 춘천 102 보충대에서 내게 보급될 때만 해도 나와 군화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265mm의 군화는 우연히 지급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행군을 하고 훈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군화는 내게 “꽃”이 되었다. 비록 타인에게 냄새나고 쓸모없는 존재일지언정, 내게는 군 생활을 함께 한 동반자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 군화는 단순한 ‘것’이란 물건에 불과하단 말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의미’가 있다. 소중한 대상이 있을 것이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나의 일만은 아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 즉 경험 세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의미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수많은 상호교섭 속에서 처리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색하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이론이 바로 상징적 교섭론이다.

그러나 블루머에 따르면, 현대 사회학은 이런 과정을 간과하고 있다. 예컨대 자극 - 반응은 전형적인 주류 심리학의 토대다. 반면 투입 - 산출은 전형적인 주류 사회학의 토대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극’, 혹은 ‘투입’에 대해 반응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된다. 하지만 블루머는 이러한 주류 학계의 믿음 자체를 논박한다. 이러한 학문은 인간에 대한 사물의 의미, 그리고 상호작용의 과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중간 과정인 상호 교섭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P29)

블루머의 말을 빌어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자. “전형적인 사회학적 도식은 행위를 지위나 문화적 규정, 규범, 가치, 제재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본다. 즉 사람들은 원인이 되는 요인들로부터 요인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행위로 비약한다.”(P36) 경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즉, 경험 세계와 인간의 집단생활은 기존에 있던 요인을 반영하는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적 교섭론을 통해 사회과학의 다른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적 교섭론에서 주장하는 의미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의미는 사물 그 자체나 인간의 심리에 내재한 것이 아니다. 의미는 사람들 사이의 교섭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지극히 사회학적 과정이다.(P32) 행위자는 해석 과정에서 의미를 선택하고, 검사하고, 유보하고, 재편성한다.(P33) 이처럼 우리는 의미를 활발하게 해석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상징적 교섭론은 방법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 태어나 한 번씩은 사랑을 겪는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사랑의 특징 중 한 가지만 꼽자면,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처음에는 열병을 앓다가도 이내 식어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반면 미지근한 관계일지언정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교섭 과정 속에서 많은 해석을 통해 의미를 수정하게 된다.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거나, 혹은 “아직까지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가” 걱정을 해보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쉽지만 이별을 통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활발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랑에 일률적인 점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사랑은 전인격적 상호 교섭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은 ‘나’와 상대방의 연합행동(joint action)의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 사는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같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부인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도,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과정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규칙을 만들고 지탱하는 것은 사회적 과정이다. 반대로 규칙이 집단생활을 만들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P53) 하지만 주류 학계는 고정 관념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그는 주장한다. “모든 경험 세계를 그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도식에 끼워 맞추는 것은 철학적인 교조화이며 진실한 경험 과학의 접근 방법을 대표하지 않는다.” (P59)

따라서 “세련성”을 강조하는 “고급 통계학”을 유일한 과학적 연구 방법이라 숭상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 이는 경험 세계의 제한된 측면밖에 다루지 못한다. 아울러 “과학적 형식 절차”에서도 모르는 새 잘못된 전제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가설이 입증되면 마치(as if)경험 세계가 그렇게 구성된 양 연구자는 착각하게 된다. 이렇게 계량화된 양적 연구에 대해 블루머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능’을 단순하게 IQ 테스트‘만’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지능은 단순하게 문제를 잘 푼다고 높은 것이 아니다. 지능은 다방면에서 측정되어야 한다. 즉, 경험 세계 내에서 어떤 융통성을 발휘하고,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블루머는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즉, 연구자는 경험 세계 속에 직접 뛰어 들어야 한다. 적어도 경험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적 연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탐색(exploration)은 친근하지 않은 수단에 접근하는 과정이다. 현대의 과학적 형식 절차가 미리 규정해 놓고 한계를 지워놓은 절차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형태다. 그리고 이러한 탐색이 진행되면서 점점 초점이 좁혀진다. 무엇이 적절한 자료인가, 무엇이 의미 있는 관련성인가를 우리는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냥감을 찾아가는 매와 같이, 연구자 역시 끊임없는 탐색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직접 관찰도 좋고 일기 연구도 좋고 면접법도 좋다. 다만 경험 세계 속에서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태세를 갖추면 된다. 탐색 단계에서는 무엇이 사냥감인지 모르므로, 파악되고 있는 관찰을 전부 기록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 이러한 과정이 질적 연구의 시작이며, 사회 현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다음 정밀 조사(inspection)은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물을 발견할 때, 만져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뜯어 보기도 하며 던져 보기도 한다. 이처럼 탐색 과정을 통해 발견된 의미를 ‘정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관찰되고 탐색된 사실을 이론적 형태로, 일반적 관계로 밝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납적 방식의 단면이다.

감지적 개념(sensitizing concept)은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된다. 이는 탐색에서 조사로 넘어갈 때 사용된다. 한정적 개념이 변인을 통제하면서 결정적이고 고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반면에, 감지적 개념은 개념의 속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또한 우리에게 경험적 사례를 제시하며 무엇을 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감지적 개념은 비결정적이며 유동적이다. 블루머는 이렇게 감지적 개념을 강조하며 결론을 내고 있다.

 

의의 및 비판

 

블루머는 “연합행동을 다양한 부분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한 부분 행동과도 다르며 또 부분들을 단순히 합한 것과도 다르다”(P50)고 주장한다. 연합 행동은 그 자체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뒤르켐의 sui genesis, 즉 사회는 구성원인 인간들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블루머에게서 뒤르켐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마 블루머는 파슨스를 위시한 주류 사회학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만약 비판의 대상이 파슨스가 맞다면, 블루머는 파슨스의 이론에 대한 중대한 오독을 저질렀다. 블루머는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 국면이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해 있는 연합 행동 형태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에 불과하다. 흔히 파슨스는 “과도사회화된 인간상”을 설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파슨스는 “제도화된 개인주의”를 말했을 뿐이다. 파슨스의 인간상은 자유 의지가 충만하다. 무엇보다 파슨스는 베버가 인간을 관료제라는 틀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아무런 문제거리가 없다는 사회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허수아비 논증에 불과하다. 파슨스는 오로지 불균형이 잠재된 균형을 주장했을 뿐이다. 모든 갈등이 제거된 상태의 사회를 그리지도 꿈꾸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 블루머의 주장은 상당히 정합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만, 파슨스의 ‘기대의 상호보완성’을 언급하며 자신의 이론과 공통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해설에 따르면, 터너의 “파슨스와 블루머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주장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논박한 블루머의 주장을 본다면, 조금은 의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파슨스 역시 조지 허버트 미드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터너의 분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 것을 보면, 이 둘의 차이는 방법론 - 연역인가 귀납인가 - 과 분석 대상 - 구조인가 상징적 교섭 과정인가 - 정도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즉, 파슨스는 유형변수(pattern variable)를 통해 어느 정도의 선험적인 체계를 구축했다면, 블루머는 이러한 변수를 무의미하게 보았다는 것, 파슨스가 구조의 기능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다면, 블루머는 구조 내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상호 교섭을 연구했다는 정도로 결론을 내면 적절할 것이다.  

by 조명래 | 2009/06/02 05:58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letluvrule.egloos.com/tb/438326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