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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사회적 기능, 루이스 코저, 박재환 옮김, 서울: 한길사, 1982. 갈등은 사회학에서 무시되어 왔다. 물론 수많은 사회학자들은 갈등을 고찰했다. 초기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근대적 열망을 지닌 채, 갈등을 연구의 중심 주제로 선택했다. 개혁적 청중은 책을 팔 시장을 형성했다. 초기 사회학자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져 갔다. 청중은 이제 관료와 정부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들은 연구를 지원하면서 연구 주제를 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은 하나의 <긴장>, <질병>, <일탈>, 혹은 심리적 <부적응>으로 분석된다. 사회학의 근본 정신은 사회 현상을 개인의 심리로 치환하지 않는 데 있다. 뒤르켐이 말했듯이 사회는 구성원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고전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회학의 모토다. 그래서 코저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한다. 과연 갈등은 이렇게 천대받아도 되는 것인가? <갈등의 사회적 기능>은 이러한 비판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현실적 갈등을 무시”하고, “갈등의 진압을 통해서 합의의 길과 상호적응을 발견”하는 사회학계에 경종을 울리려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밀스의 <파워 엘리트>에서도 제기되었듯이, 사회 구조를 파악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개인적 능력을 분석 틀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과연 위정자의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과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조화에 대한 요구는 과연 정당한가? 갈등은 반드시 사회를 좀먹는 것인가? 이제 코저는 짐멜의 <갈등은 사회화의 한 형식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이를 논박해갈 것이다. 집단 내의 갈등이 전부 분열적인 요소인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긍정적>, <부정적> 요소 모두 집단관계를 만들어 가는 동력이다. 그렇다면 갈등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단순하게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식과 개념은 즉각적으로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코저의 명저 <갈등의 사회적 기능>도 이때 의미가 있다. 1950년대의 미국 사회를 가로질러 2009년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유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코저를 읽어야 한다. 우선 코저는 짐멜의 사회학의 본질에 어긋나는 분석 방법을 비판한다. 개인 인성과 사회 체계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 물론 부분적으로 대응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개인의 특징적인 행위가 구조화된 사회 체계의 분석에는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순한 적대감과 갈등은 구별되어야 한다. 적대감은 갈등의 바탕일 뿐이다. 이에 비해서 갈등은 상호 교류라는 지극히 사회학적 활동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적대감이 갈등으로 발전하는 계기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변수는 <정당성>이다. 이는 일정 부분 베버의 의견을 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자.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은 투쟁 속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로 간의 배척이 다양한 집단 간의 균형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갈등 속에서 각 집단은 개별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균형점이 발생하고, 전체 사회 구조의 안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외집단이 반드시 갈등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준거가 될 수도 있고, 모방의 대상이될 수도 있다. 갈등은 사회에 따라 다르게 분출된다. 사회 이동을 허용하는 계급 체계에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낮은 계층의 구성원들은 높은 계층을 선망한다. 적대감은 매력과 뒤섞여 있다.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의 <신 포도>를 선망한다. 물론 그것이 원한으로 바뀌기는 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 이를 은근히 선망하는 한국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반면 카스트 제도처럼 공고한 신분 체계 속에서, 상위 계층에 대한 모방은 최소화된다. 외집단에 대한 공격적 성향은 반드시 직접적인 형태로만 분출되지는 않는다. 다른 대체물로 “환치”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자체가 만족감을 주는 긴장 해소 행위가 있다. 짐멜은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는 때때로 제도화된 형태로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도 한다. 예컨대 유럽의 카니발이 대표적이다. 이때만큼은 중세의 억압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음껏 성적 욕망을 펼칠 수 있었다. 주술은 권력자에 대해 아무렇게나 표출할 수 없는 적대감의 해소 방법이다. 4)위트는 권력자에 대한 하나의 공격, 혹은 비판 무기로 애용된다. 한국의 경우 <봉산탈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연극 및 오락의 형태로 결합되어 등장한다. 양반에 대한 적대감을 풍자와 해학으로 비판하는 <봉산탈춤>은, 반항을 <환치>시켜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잠재적인 적대감을 없애고, 그 사회가 계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판 제도의 기능은 제한적이다. 갈등은 상호작용 관계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적대감의 단순한 표출은 상호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은 <봉산탈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서 구경했다. 이는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일정 부분 상실했다고 판단한 데 기인한다. 불만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말뚝이는 발버둥치지 않는다. 다만 해학과 풍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은 긴장을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만스러운 상황은 변하지 않고, 구 체제는 존속해 나갈 것이다. 갈등은 공격적 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코저는 <현실적 갈등>과 <비현실적 갈등>을 구분한다. 전자는 일정한 목표와 수단이 있고 특정한 결과를 겨냥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논의할 갈등의 범주이다. 반면 후자는 긴장 해소의 필요 때문에 야기된다. 이때 쟁점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요소가 선택되기도 하고, 달성에 대한 지향도 없다 현실적 갈등은 <수단>을 중시하고, 비현실적 갈등은 <대상>을 중시한다. 즉, 후자는 <긴장 해소>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은 구별은 현실적 갈등의 사회적 현상을 전적으로 <긴장 해소>로 치환하는 오류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학자의 테마도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개인만을 조명하지 않고,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의 힘을 알아내는 것이, 사회학의 중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애증’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말 그대로 애정과 증오가 한데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의 감정 속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코저는 이러한 감정의 양면성을 주목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는 협력하고 있고, 공통의 이익으로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매일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갈등은 싹트기 쉽다. 예컨대 남편과 아내는, 연애와 달리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 서게 된다. 매일 서로는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따라서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가사 분담에서 금전 관리에 이르기까지 갈등은 어디서나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관계가 가까워지면 서로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사생활을 파괴하고 구속하게 된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남편은 못마땅해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만남을 계속 가진다면 갈등은 심화되고,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일이다. 갈등이 없다고 해서 집단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갈등을 피하는 집단은, 갈등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판단하는 것이다. 1차 집단과 같은 폐쇄적인 관계에서 갈등이 치열해진다는 명제는 앞서 제기되었다. 이를 발전적으로 생각해 보자. 예컨대 결혼 생활이라는 폐쇄적인 관계의 경우, 배우자 사이에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부부 관계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래서 갈등은 관계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기능한다. 다른 집단과의 갈등은 집단 성원의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집단의 단결을 강화한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반 세기 한국을 지배한 것은 냉전 논리였다. 북한은 북괴로서 늑대의 탈을 쓴 악마였다. 한국전쟁에서 어머니와 자식을 죽인 철천지 원수였으며, 위정자들은 이러한 적대심을 교묘하게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즉, 북한과의 갈등은 흩어져 있던 한국 민중의 마음을 합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병영체제는 유지되어야 했고, 이는 군사 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 주요 배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북한을 도와주는 집단을 해치는 행위쯤으로 매도되었고, 이는 상당 부분 민중에게 “정당성”을 부여 받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현실적인 대치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에, 집단 전체의 틀을 깨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외부와 싸우고 있는 집단은 내부의 불만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며, 집단에 대한 전인격적 몰입과 집단 통일성을 요구한다. 단단하게 조직된 집단은 통일성과 단결 유지를 꾀한다는 점을 앞서 지적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혹은 의외의 결과로 적을 찾을 수도 있다. 설령 어떠한 위협이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외부의 위협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집단은 외집단을 적으로 끌어들이거나 날조하면서 집단의 통일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은 내부의 현실적 갈등을 금하는 집단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된 경우를 살펴 보자. 당시 일본은 전체주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집단 성원의 단결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동대지진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결국 이는 위정자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났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의도적으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태운다”는 등의 기사를 날조하면서 불만을 외집단인 조선인에게 돌리게 된다. “조센징”을 축출하고 학살하는 과정 속에서 집단의 불만은 잠재워질 수 있는 것이다. 대의 명분을 지닌 채 희생하는 자세는 모종의 숭고함을 불러 일으킨다. 즉, 자신은 이기적인 차원에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오직 전체와 집단의 대표자라 여기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집단의 이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갈등의 양상은 보다 첨예화된다. 보다 과격하고 냉혹한 형태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개인적 요소가 있을 때는 가까운 친교 관계, 혹은 인정에 의한 조정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집단의 규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때, 대의 명분을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계 곳곳에서 혁명은 발생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 앞에 부르주아 및 자본가는 예전의 개인적 관계가 무시된 채 죽어가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이러한 엄격한 이념적 노선의 경우, 이런 상황은 더욱 극명하다. 갈등의 객관화는, 즉 당사자 모두가 과학적 믿음을 갖고 동일한 목적을 추구할 때, 한 집단에 대한 통합적 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 분단 상황에 직면했던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한국전쟁은 야만의 시대라 부를 만했다. 친구였던 자가 완장을 차고 나타나 자신의 가족을 학살한 경우가 부지기수며, 이는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과 같은 분단 문학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의명분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라지며 원리와 원칙만이 남게 된다. 이를 통해 한 집단은 더더욱 단결할 수 있으며, 외집단은 증오심을 키울 수밖에 없다. 짐멜은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조직이 유리하므로, 각 당사자는 적대자가 통일성을 결여하기를 강렬히 바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저는 이는 언제나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양 집단 간에 상대적 세력 균형이 있다면, 통일된 당사자는 역시 통일된 적대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은 고용주 개개인보다 고용주의 결사체와 상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고용주 역시 자율적인 구성원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노동 조직과 상대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저의 이러한 주장은 선진 산업사회에서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은 가운데서 생겨났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정합성을 찾기는 힘들다. 여전히 한국의 고용주의 대부분은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심지어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서면이 아닌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 받고 있다. “적의 산만한 군중과 대항해서, 사람들은 따로 따로의 승리는 보다 자주 얻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다음에 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자리잡게 해 주는 결정적인 결과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코저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한국의 고용주, 그리고 정부의 최대 목적은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도록,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통해서 노동자의 단결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노동계의 분열로 이어지면서 일정 부분 성공을 이루고 있다. 즉, “귀족 노조” 대 비정규직 노조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한 집단의 투쟁과 연합은 외집단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를 살펴보자. 이들은 “근무 태만”으로 문자 해고를 당했고, 지난 몇 년 간 복직을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해고 사유는 비정규직 노조의 결성이었다. 최저 임금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로 낮은 단가를 유지했던 회사로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조직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결사는 이에 대한 대항을 불러오기 때문에 사회학적으로 중요하다. 투쟁은 원자화된 개인을 모은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관심이 없던 “아줌마”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연합과 투쟁 속에서 그들은 개인주의적 사회에 구조를 부여하고, 원자화를 통한 분열을 막는다. 즉, 노동자가 분열되지 않은 채 연합함으로써 사용자의 “횡포”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새로운 결사와 연합, 즉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와 정당을 이끌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참여를 보다 활발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특히 갈등은 경시되는 측면이 크다. 경제 살리기의 일환으로서, 정부와 여당은 “사회적 대통합”을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다. 대체 누구를 위한 “사회적 대통합”일까? 약자의 권익을 위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반체제적 행위로 낙인 찍힐 뿐이다. 오로지 정부는 “기업 프렌들리”의 원칙 속에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권력 엘리트의 이익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득권과 대립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는 일본 관광객까지 폭행하는 초유의 공권력을 반대자들을 향해 투입하고 있다. 진정 “갈등의 사회적 기능”을 안다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의 뜻을 이해한다면, 갈등이 드러내고 있는 지점, 즉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갈등의 분출을 막는 데만 급급한다면, 정부의 탄압은 전 국민적 저항과 단결을 불러올 것이다. 이미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이미 “촛불 소녀”가 등장했고 초등학생까지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분명 지난 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체제 비판적인 인사를 연행하고 고문하고 탄압했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직선제와 개헌을 이루어냈다. 정부는 그저 갈등을 무마하려고만 했다. 이때 국민은 집단적으로 결속하면서 “현실적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고, 뚜렷한 이상과 목표를 지니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결사와 연합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끊임없이 북한 위협론을 통해 국가적 단결을 외침으로써, 외집단과의 갈등을 통해 내적 응집력을 증대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80년 대에는 마르크스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은 분신을 서슴지 않는 등의 냉철한 투쟁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따라서 한국의 위정자는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갈등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을 거듭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보다 더 견실한 형태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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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사랑의 기술 장소와 장소상실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 역사는 무엇인가 자본론 일차원적 인간 최장집의 "민주주의" 시리즈 문명화 과정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이글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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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by 오리지날U at 10/05 잘 보고 갑니다. by imc84 at 04/14 나머지는 다음에... by 조명래 at 04/14 네, 많은 조언 바랍니다.. by 조명래 at 04/14 오랜만에 뵙네요. 앞으로.. by esall at 04/13 생각해보면 참 외로운 .. by Jocelyn at 01/01 네, 많은 도움 바랍니다.. by 조명래 at 12/15 참, 별개로, 이런 생각.. by 류현 at 12/11 자주 들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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