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한 시공간
장소와 장소상실,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서울: 논형, 2008.

경북대학교는 포스트모던하다. 즉,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명제를 충실히 따른다. 가령, 본관과 사범대 신관 건물을 비교해 보라. 분명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관은 그리스 식의 웅장함을 표현하는데 비해, 사범대 신관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모더니즘 양식이다. 이렇게 경북대학교는 짬뽕된 시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곧 착공될 '글로벌 플라자'는 자뭇 미래적인 건축양식인 모양이다. '글로벌'이라는 말에 담긴 다양성을 떠올려 보라.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는 절묘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깔깔거리며 캠퍼스를 누빌 것이다.

"동시성의 비동시성"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시간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상황을 말한다. 가령, 사범대 구관 건물을 예로 들어보자. 전형적인 일제시대의 벽돌 건축양식인 이곳은, 이상하게 파란색 기와를 지붕에 얹고 있다. 게다가 보수공사를 통해 제법 현대적인 양식도 덧붙여 가고 있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경주에 갔을 때 느꼈던 생경한 기분도 함께 떠올려 보자. 이렇게 혼재된 건축양식에 대해 가치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경향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식장이나 러브호텔의 경우도 어떤가? 조악한 혼성모방이 가득한 건축양식이 아니던가.

이렇듯 경북대학교란 시공간을 분석한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를 예로 들어보자. 이곳은 다양한 국적과 언어와 음식과 건축이 공존하는 곳이다. 때때로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사람이 중국말을 하는 건지 한국말을 하는 건지도 구분이 어렵다. 이것은 흡사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장면을 떼온 것만 같다. 기숙사의 건축양식은 한옥식 기와에 벽돌 건물이고, 식당의 메뉴는 빵, 우유, 잼, 스프, 밥, 김치, 샐러드, 국 등이 나오면서 다양한 식성을 반영한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에드워드 랠프는 <장소와 장소상실>이란 책에서, 오늘날의 시공간은 진정성을 잃고 있다고 비판한다. '무장소성'의 심화로 '박물관화', '디즈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물관화'는 장소성을 잃고 맥락에서 벗어난 시공간이다. 가령, 그리스의 유물은 역사의 숨결을 지닌 바로 그곳에 있어야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 유물과 함께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맥락을 잃고 유물은 박물관에 전시되면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제법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장한 존재론의 냄새를 풍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소란 소비주의가 더욱 심화된 후기 자본주의 논리의 지배를 받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디즈니화로서 시공간의 위락화다. 가령, 궁전 아닌 궁전으로 솟아 있는 모텔과 예식장을 보라. 모텔은 남녀를 위한 할렘으로 보이기 위해 화려한 네온사인과 어설픈 혼성모방을 시도한다. 예식장도 마찬가지다.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못봐줄 구성의 코린트, 이오니아 양식의 모방"과 아울러, 오늘날의 예식장 내의 결혼은 시간 내에 빨리빨리 마쳐야 하는, 최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면서 결혼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은 어쩔 수 없으며, 세계화와 포스트모던의 물결은 시대적 흐름이라며, 도대체 '진정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반문한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건축양식을 띠며 맥락을 잃어가는 사회는 분명 디스토피아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시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의 시공간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진정 풍요로운 삶인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시공간은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이제 거기에 대한 물음이 필요할 때다.

by 조명래 | 2009/06/06 21:29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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