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연극학적 사회학의 관점에서
어빙 고프먼이 연극학적 사회학을 통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front stage와 back stage를 지니고 있다. 미키 루크의 영화 <더 레슬러>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누구나 레슬러처럼 만신창이가 되어도 front stage에서는 웃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고통을 애써 숨기고 다시 한 번 무대로 들어선다.

그는 항상 "랜디 램"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을 벗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는 back stage에서 집세가 밀린 "램진스키"일 뿐이다. "램진스키"는 심장병에 부상으로 대기실에서 고통스러워 하지만, 가면을 쓴 "랜디"는 20년 전처럼 "챔피언"이다. 영화에서 드러났던 것처럼, 이 작품은 그래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세속적 버전이다.

이는 스태플러에 철조망에 찍힌 채 고통스러워 하는 "램진스키"의 모습을 볼 때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나는 모종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가 못 박히던 것처럼 세속의 인간들도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살아간다. 다만 back stage에서 홀로 고통을 이겨낼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스트리퍼인 "캐시디" 역시 현실의 "팸"을 애써 숨기려 한다. 무대에서 내려온 그녀에게는 아이가 있고, 손님과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스트립바와의 계약이 있다. 그래서 "랜디"를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려 들고, 밤의 스트립바가 아닌 낮에 거리에서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다. 가면을 벗는다는 건 참 낯선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감정의 과잉으로 치달을 수 있었지만, 이를 최대한 절제하려는 데에 있다. 대다수의 한국 영화는 이런 상황에서 최대한 눈물을 짜내려 하면서 서정적인 BGM을 깐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그저 담담하게 이 모든 것들을 담아낸다. 진정한 슬픔이란 눈물을 애써 참으려 하는 것이기에.
by 조명래 | 2009/10/05 01:40 | 트랙백 | 덧글(1)
버져 비트와 신자유주의

동생과 버져 비트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았다. 주인공은 "야마삐"라는 인기 배우. 극중에서 농구 선수로 나오는 그는, 과거 득점왕을 휩쓸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프로에 진출하면서 그는 번번히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고, 불경기로 연봉마저 삭감되면서 아리따운 여친마저 별로 멋있지도 않은데 싸가지 없는 더 능력 있는 동료 선수와 바람을 핀다.

우선 손발이 오그라들던 대목은, 너무나 티나는 복선을 드러낸다는 것. 한 두 개가 아니라 집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거두절미하고 이 드라마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득점왕은 과거 일본의 위상을 은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부진한 모습은 버블경제의 붕괴로 내려앉아 와신상담하는 일본의 위상을 은유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지나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성세대의 분신인 코치는 야마삐에게 젊은이답게 패기 있는 삶을 살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인생을 즐기며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게 젊음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박하스 CF와 같은 시츄에이션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도르노는 미국의 한 시트콤이 어려운 현실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간호사의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를 꾀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녀는 사랑스럽고, 그래서 지배 계급이 열망하는 존재다. 대중은 브라운관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자신을 거울에 비쳐본다.

야마삐는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체제에 사는 존재다. 장신의 외국인 용병과, 입이 벌어질 정도로 차이가 나는 선수 간의 연봉, 선수 간의 견제를 걱정거리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주인공은 "이류대학"을 나와 알바로 생계를 잇는다.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화면에 줄기차게 등장하는 "사랑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명제는 사실일까? 정말 이 드라마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의 힘으로 어려운 현실을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버져 비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 드라마는 단순히 즐기고 넘어갈 차원을 넘어서, 문화사회학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by 조명래 | 2009/08/03 00:51 | 트랙백 | 덧글(0)
포스트모던한 시공간
장소와 장소상실, 에드워드 렐프, 김덕현 김현주 심승희 옮김, 서울: 논형, 2008.

경북대학교는 포스트모던하다. 즉, "동시성의 비동시성"이라는 명제를 충실히 따른다. 가령, 본관과 사범대 신관 건물을 비교해 보라. 분명 극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본관은 그리스 식의 웅장함을 표현하는데 비해, 사범대 신관은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모더니즘 양식이다. 이렇게 경북대학교는 짬뽕된 시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게다가 곧 착공될 '글로벌 플라자'는 자뭇 미래적인 건축양식인 모양이다. '글로벌'이라는 말에 담긴 다양성을 떠올려 보라.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는 절묘하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깔깔거리며 캠퍼스를 누빌 것이다.

"동시성의 비동시성"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시간적으로 함께 있을 수 없는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상황을 말한다. 가령, 사범대 구관 건물을 예로 들어보자. 전형적인 일제시대의 벽돌 건축양식인 이곳은, 이상하게 파란색 기와를 지붕에 얹고 있다. 게다가 보수공사를 통해 제법 현대적인 양식도 덧붙여 가고 있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경주에 갔을 때 느꼈던 생경한 기분도 함께 떠올려 보자. 이렇게 혼재된 건축양식에 대해 가치판단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것이 오늘날의 경향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식장이나 러브호텔의 경우도 어떤가? 조악한 혼성모방이 가득한 건축양식이 아니던가.

이렇듯 경북대학교란 시공간을 분석한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작업이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를 예로 들어보자. 이곳은 다양한 국적과 언어와 음식과 건축이 공존하는 곳이다. 때때로 이곳이 중국인지 한국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 사람이 중국말을 하는 건지 한국말을 하는 건지도 구분이 어렵다. 이것은 흡사 블레이드 러너에 등장하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장면을 떼온 것만 같다. 기숙사의 건축양식은 한옥식 기와에 벽돌 건물이고, 식당의 메뉴는 빵, 우유, 잼, 스프, 밥, 김치, 샐러드, 국 등이 나오면서 다양한 식성을 반영한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을 개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에드워드 랠프는 <장소와 장소상실>이란 책에서, 오늘날의 시공간은 진정성을 잃고 있다고 비판한다. '무장소성'의 심화로 '박물관화', '디즈니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박물관화'는 장소성을 잃고 맥락에서 벗어난 시공간이다. 가령, 그리스의 유물은 역사의 숨결을 지닌 바로 그곳에 있어야 진정성을 지닐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그 유물과 함께 했던 것이다. 하지만 맥락을 잃고 유물은 박물관에 전시되면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제법 마르틴 하이데거가 주장한 존재론의 냄새를 풍긴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장소란 소비주의가 더욱 심화된 후기 자본주의 논리의 지배를 받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디즈니화로서 시공간의 위락화다. 가령, 궁전 아닌 궁전으로 솟아 있는 모텔과 예식장을 보라. 모텔은 남녀를 위한 할렘으로 보이기 위해 화려한 네온사인과 어설픈 혼성모방을 시도한다. 예식장도 마찬가지다. 진중권의 말을 빌리자면, "못봐줄 구성의 코린트, 이오니아 양식의 모방"과 아울러, 오늘날의 예식장 내의 결혼은 시간 내에 빨리빨리 마쳐야 하는, 최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면서 결혼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혹자는 이러한 상황은 어쩔 수 없으며, 세계화와 포스트모던의 물결은 시대적 흐름이라며, 도대체 '진정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반문한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건축양식을 띠며 맥락을 잃어가는 사회는 분명 디스토피아다.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시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의 시공간은 그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진정 풍요로운 삶인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시공간은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이제 거기에 대한 물음이 필요할 때다.

by 조명래 | 2009/06/06 21:29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사회과학의 상징적 교섭론, 허버트 블루머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이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분석

 

상징적 교섭론이라는 말은 언뜻 추상적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김춘수의 <꽃>을 토대로 상징적 교섭론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름을 불러 주기 전”, 즉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없었을 때는, 이들의 관계는 “하나의 몸짓”이라는 ‘비상징적 교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각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혹은 어떤 존재인지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즉, 두 사람은 하나의 “꽃”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된다.

혹은 이런 경우도 있다. 군 복무 시절 내 군화는 어떤 존재였는가? 춘천 102 보충대에서 내게 보급될 때만 해도 나와 군화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265mm의 군화는 우연히 지급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행군을 하고 훈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군화는 내게 “꽃”이 되었다. 비록 타인에게 냄새나고 쓸모없는 존재일지언정, 내게는 군 생활을 함께 한 동반자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 군화는 단순한 ‘것’이란 물건에 불과하단 말인가?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의미’가 있다. 소중한 대상이 있을 것이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는 비단 나의 일만은 아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 즉 경험 세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의미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수많은 상호교섭 속에서 처리되고, 변형되고, 사라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색하는 방법론을 모색하는 이론이 바로 상징적 교섭론이다.

그러나 블루머에 따르면, 현대 사회학은 이런 과정을 간과하고 있다. 예컨대 자극 - 반응은 전형적인 주류 심리학의 토대다. 반면 투입 - 산출은 전형적인 주류 사회학의 토대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극’, 혹은 ‘투입’에 대해 반응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된다. 하지만 블루머는 이러한 주류 학계의 믿음 자체를 논박한다. 이러한 학문은 인간에 대한 사물의 의미, 그리고 상호작용의 과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중간 과정인 상호 교섭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P29)

블루머의 말을 빌어 좀 더 부연 설명을 해보자. “전형적인 사회학적 도식은 행위를 지위나 문화적 규정, 규범, 가치, 제재 등과 같은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본다. 즉 사람들은 원인이 되는 요인들로부터 요인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행위로 비약한다.”(P36) 경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즉, 경험 세계와 인간의 집단생활은 기존에 있던 요인을 반영하는 공간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징적 교섭론을 통해 사회과학의 다른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적 교섭론에서 주장하는 의미의 근원이란 무엇인가? 의미는 사물 그 자체나 인간의 심리에 내재한 것이 아니다. 의미는 사람들 사이의 교섭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지극히 사회학적 과정이다.(P32) 행위자는 해석 과정에서 의미를 선택하고, 검사하고, 유보하고, 재편성한다.(P33) 이처럼 우리는 의미를 활발하게 해석하는 과정에 주목해야 하며, 따라서 상징적 교섭론은 방법론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 태어나 한 번씩은 사랑을 겪는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을 정의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하지만 사랑의 특징 중 한 가지만 꼽자면,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의미’는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처음에는 열병을 앓다가도 이내 식어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반면 미지근한 관계일지언정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교섭 과정 속에서 많은 해석을 통해 의미를 수정하게 된다.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가고 있는가” 성찰해 보거나, 혹은 “아직까지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가” 걱정을 해보기도 하고,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아쉽지만 이별을 통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활발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사랑에 일률적인 점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무엇보다 사랑은 전인격적 상호 교섭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은 ‘나’와 상대방의 연합행동(joint action)의 속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각자 사는 “세계”는 결코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같은 물리적 공간에 존재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부인과 같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도,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의미를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주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과정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규칙을 만들고 지탱하는 것은 사회적 과정이다. 반대로 규칙이 집단생활을 만들고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P53) 하지만 주류 학계는 고정 관념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그는 주장한다. “모든 경험 세계를 그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도식에 끼워 맞추는 것은 철학적인 교조화이며 진실한 경험 과학의 접근 방법을 대표하지 않는다.” (P59)

따라서 “세련성”을 강조하는 “고급 통계학”을 유일한 과학적 연구 방법이라 숭상하는 것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 이는 경험 세계의 제한된 측면밖에 다루지 못한다. 아울러 “과학적 형식 절차”에서도 모르는 새 잘못된 전제나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 가설이 입증되면 마치(as if)경험 세계가 그렇게 구성된 양 연구자는 착각하게 된다. 이렇게 계량화된 양적 연구에 대해 블루머는 단호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능’을 단순하게 IQ 테스트‘만’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지능은 단순하게 문제를 잘 푼다고 높은 것이 아니다. 지능은 다방면에서 측정되어야 한다. 즉, 경험 세계 내에서 어떤 융통성을 발휘하고,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블루머는 귀납적이고 경험적인 분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즉, 연구자는 경험 세계 속에 직접 뛰어 들어야 한다. 적어도 경험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양적 연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한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탐색(exploration)은 친근하지 않은 수단에 접근하는 과정이다. 현대의 과학적 형식 절차가 미리 규정해 놓고 한계를 지워놓은 절차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형태다. 그리고 이러한 탐색이 진행되면서 점점 초점이 좁혀진다. 무엇이 적절한 자료인가, 무엇이 의미 있는 관련성인가를 우리는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냥감을 찾아가는 매와 같이, 연구자 역시 끊임없는 탐색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직접 관찰도 좋고 일기 연구도 좋고 면접법도 좋다. 다만 경험 세계 속에서 상황에 맞게 적응하며,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태세를 갖추면 된다. 탐색 단계에서는 무엇이 사냥감인지 모르므로, 파악되고 있는 관찰을 전부 기록하는 것이 좋다. 무엇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른다. 이러한 과정이 질적 연구의 시작이며, 사회 현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 다음 정밀 조사(inspection)은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물을 발견할 때, 만져 보기도 하고 뒤집어 보기도 하고 뜯어 보기도 하며 던져 보기도 한다. 이처럼 탐색 과정을 통해 발견된 의미를 ‘정밀’하게 ‘조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관찰되고 탐색된 사실을 이론적 형태로, 일반적 관계로 밝혀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납적 방식의 단면이다.

감지적 개념(sensitizing concept)은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된다. 이는 탐색에서 조사로 넘어갈 때 사용된다. 한정적 개념이 변인을 통제하면서 결정적이고 고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반면에, 감지적 개념은 개념의 속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또한 우리에게 경험적 사례를 제시하며 무엇을 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감지적 개념은 비결정적이며 유동적이다. 블루머는 이렇게 감지적 개념을 강조하며 결론을 내고 있다.

 

의의 및 비판

 

블루머는 “연합행동을 다양한 부분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한 부분 행동과도 다르며 또 부분들을 단순히 합한 것과도 다르다”(P50)고 주장한다. 연합 행동은 그 자체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뒤르켐의 sui genesis, 즉 사회는 구성원인 인간들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블루머에게서 뒤르켐의 그림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마 블루머는 파슨스를 위시한 주류 사회학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만약 비판의 대상이 파슨스가 맞다면, 블루머는 파슨스의 이론에 대한 중대한 오독을 저질렀다. 블루머는 “인간 사회의 모든 생활 국면이 어느 사회에서나 기존해 있는 연합 행동 형태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에 불과하다. 흔히 파슨스는 “과도사회화된 인간상”을 설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파슨스는 “제도화된 개인주의”를 말했을 뿐이다. 파슨스의 인간상은 자유 의지가 충만하다. 무엇보다 파슨스는 베버가 인간을 관료제라는 틀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아무런 문제거리가 없다는 사회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허수아비 논증에 불과하다. 파슨스는 오로지 불균형이 잠재된 균형을 주장했을 뿐이다. 모든 갈등이 제거된 상태의 사회를 그리지도 꿈꾸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 블루머의 주장은 상당히 정합성을 상실하게 된다. 다만, 파슨스의 ‘기대의 상호보완성’을 언급하며 자신의 이론과 공통점을 드러냈다. 하지만 해설에 따르면, 터너의 “파슨스와 블루머의 이론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주장에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논박한 블루머의 주장을 본다면, 조금은 의아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파슨스 역시 조지 허버트 미드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터너의 분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한 것을 보면, 이 둘의 차이는 방법론 - 연역인가 귀납인가 - 과 분석 대상 - 구조인가 상징적 교섭 과정인가 - 정도로 좁힐 수 있을 것이다. 즉, 파슨스는 유형변수(pattern variable)를 통해 어느 정도의 선험적인 체계를 구축했다면, 블루머는 이러한 변수를 무의미하게 보았다는 것, 파슨스가 구조의 기능에 대한 고민을 주로 했다면, 블루머는 구조 내에 살고 있는 개개인의 상호 교섭을 연구했다는 정도로 결론을 내면 적절할 것이다.  

by 조명래 | 2009/06/02 05:58 | 트랙백 | 덧글(0)
갈등의 사회적 기능, 루이스 코저

갈등의 사회적 기능, 루이스 코저, 박재환 옮김, 서울: 한길사, 1982.

갈등은 사회학에서 무시되어 왔다. 물론 수많은 사회학자들은 갈등을 고찰했다. 초기 사회학자들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근대적 열망을 지닌 채, 갈등을 연구의 중심 주제로 선택했다. 개혁적 청중은 책을 팔 시장을 형성했다. 초기 사회학자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져 갔다. 청중은 이제 관료와 정부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들은 연구를 지원하면서 연구 주제를 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은 하나의 <긴장>, <질병>, <일탈>, 혹은 심리적 <부적응>으로 분석된다. 사회학의 근본 정신은 사회 현상을 개인의 심리로 치환하지 않는 데 있다. 뒤르켐이 말했듯이 사회는 구성원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고전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사회학의 모토다.

그래서 코저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한다. 과연 갈등은 이렇게 천대받아도 되는 것인가? <갈등의 사회적 기능>은 이러한 비판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현실적 갈등을 무시”하고, “갈등의 진압을 통해서 합의의 길과 상호적응을 발견”하는 사회학계에 경종을 울리려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밀스의 <파워 엘리트>에서도 제기되었듯이, 사회 구조를 파악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개인적 능력을 분석 틀로 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과연 위정자의 갈등을 바라보는 시선과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조화에 대한 요구는 과연 정당한가? 갈등은 반드시 사회를 좀먹는 것인가? 이제 코저는 짐멜의 <갈등은 사회화의 한 형식이다>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이를 논박해갈 것이다. 집단 내의 갈등이 전부 분열적인 요소인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긍정적>, <부정적> 요소 모두 집단관계를 만들어 가는 동력이다.

그렇다면 갈등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를 단순하게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식과 개념은 즉각적으로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코저의 명저 <갈등의 사회적 기능>도 이때 의미가 있다. 1950년대의 미국 사회를 가로질러 2009년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사유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코저를 읽어야 한다.

우선 코저는 짐멜의 사회학의 본질에 어긋나는 분석 방법을 비판한다. 개인 인성과 사회 체계는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없다. 물론 부분적으로 대응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개인의 특징적인 행위가 구조화된 사회 체계의 분석에는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단순한 적대감과 갈등은 구별되어야 한다. 적대감은 갈등의 바탕일 뿐이다. 이에 비해서 갈등은 상호 교류라는 지극히 사회학적 활동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적대감이 갈등으로 발전하는 계기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변수는 <정당성>이다. 이는 일정 부분 베버의 의견을 차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자.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은 투쟁 속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서로 간의 배척이 다양한 집단 간의 균형을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갈등 속에서 각 집단은 개별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균형점이 발생하고, 전체 사회 구조의 안정을 가져오기도 한다.

외집단이 반드시 갈등의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긍정적인 준거가 될 수도 있고, 모방의 대상이될 수도 있다. 갈등은 사회에 따라 다르게 분출된다. 사회 이동을 허용하는 계급 체계에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낮은 계층의 구성원들은 높은 계층을 선망한다. 적대감은 매력과 뒤섞여 있다. 하위 계층은 상위 계층의 <신 포도>를 선망한다. 물론 그것이 원한으로 바뀌기는 쉬운 일이지만 말이다. 예컨대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면서 이를 은근히 선망하는 한국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반면 카스트 제도처럼 공고한 신분 체계 속에서, 상위 계층에 대한 모방은 최소화된다.

외집단에 대한 공격적 성향은 반드시 직접적인 형태로만 분출되지는 않는다. 다른 대체물로 “환치”할 수도 있다. 또한 그 자체가 만족감을 주는 긴장 해소 행위가 있다. 짐멜은 이러한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는 데 실패했다. 사회는 때때로 제도화된 형태로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도 한다. 예컨대 유럽의 카니발이 대표적이다. 이때만큼은 중세의 억압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마음껏 성적 욕망을 펼칠 수 있었다.

주술은 권력자에 대해 아무렇게나 표출할 수 없는 적대감의 해소 방법이다. 4)위트는 권력자에 대한 하나의 공격, 혹은 비판 무기로 애용된다. 한국의 경우 <봉산탈춤>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연극 및 오락의 형태로 결합되어 등장한다. 양반에 대한 적대감을 풍자와 해학으로 비판하는 <봉산탈춤>은, 반항을 <환치>시켜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잠재적인 적대감을 없애고, 그 사회가 계속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러한 안전판 제도의 기능은 제한적이다. 갈등은 상호작용 관계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적대감의 단순한 표출은 상호관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은 <봉산탈춤>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서 구경했다. 이는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일정 부분 상실했다고 판단한 데 기인한다. 불만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말뚝이는 발버둥치지 않는다. 다만 해학과 풍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민중은 긴장을 해소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만스러운 상황은 변하지 않고, 구 체제는 존속해 나갈 것이다.

갈등은 공격적 에너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코저는 <현실적 갈등>과 <비현실적 갈등>을 구분한다. 전자는 일정한 목표와 수단이 있고 특정한 결과를 겨냥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논의할 갈등의 범주이다. 반면 후자는 긴장 해소의 필요 때문에 야기된다. 이때 쟁점에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요소가 선택되기도 하고, 달성에 대한 지향도 없다

현실적 갈등은 <수단>을 중시하고, 비현실적 갈등은 <대상>을 중시한다. 즉, 후자는 <긴장 해소>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와 같은 구별은 현실적 갈등의 사회적 현상을 전적으로 <긴장 해소>로 치환하는 오류를 피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학자의 테마도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개인만을 조명하지 않고, 개인이 구성하는 사회의 힘을 알아내는 것이, 사회학의 중심 과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애증’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말 그대로 애정과 증오가 한데 섞여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의 감정 속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코저는 이러한 감정의 양면성을 주목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계는 협력하고 있고, 공통의 이익으로 결합되어 있다. 게다가 매일 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집단의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갈등은 싹트기 쉽다. 예컨대 남편과 아내는, 연애와 달리 결혼이라는 현실 앞에 서게 된다. 매일 서로는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고, 따라서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가사 분담에서 금전 관리에 이르기까지 갈등은 어디서나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게다가 관계가 가까워지면 서로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사생활을 파괴하고 구속하게 된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남편은 못마땅해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만남을 계속 가진다면 갈등은 심화되고,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일이다.

갈등이 없다고 해서 집단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갈등을 피하는 집단은, 갈등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다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판단하는 것이다. 1차 집단과 같은 폐쇄적인 관계에서 갈등이 치열해진다는 명제는 앞서 제기되었다. 이를 발전적으로 생각해 보자. 예컨대 결혼 생활이라는 폐쇄적인 관계의 경우, 배우자 사이에서 적대감을 표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그러한 행동이 부부 관계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그래서 갈등은 관계의 안정성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기능한다.

다른 집단과의 갈등은 집단 성원의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집단의 단결을 강화한다. 이는 한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난 반 세기 한국을 지배한 것은 냉전 논리였다. 북한은 북괴로서 늑대의 탈을 쓴 악마였다. 한국전쟁에서 어머니와 자식을 죽인 철천지 원수였으며, 위정자들은 이러한 적대심을 교묘하게 정권 연장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즉, 북한과의 갈등은 흩어져 있던 한국 민중의 마음을 합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병영체제는 유지되어야 했고, 이는 군사 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 주요 배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북한을 도와주는 집단을 해치는 행위쯤으로 매도되었고, 이는 상당 부분 민중에게 “정당성”을 부여 받은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북한과의 현실적인 대치가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에, 집단 전체의 틀을 깨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외부와 싸우고 있는 집단은 내부의 불만에 대해 너그럽지 못하며, 집단에 대한 전인격적 몰입과 집단 통일성을 요구한다.

단단하게 조직된 집단은 통일성과 단결 유지를 꾀한다는 점을 앞서 지적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혹은 의외의 결과로 적을 찾을 수도 있다. 설령 어떠한 위협이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외부의 위협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집단은 외집단을 적으로 끌어들이거나 날조하면서 집단의 통일성을 강화할 수 있다.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은 내부의 현실적 갈등을 금하는 집단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학살된 경우를 살펴 보자. 당시 일본은 전체주의, 제국주의 국가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며 세계로 뻗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따라서 집단 성원의 단결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동대지진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결국 이는 위정자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났다. 이때 일본 정부는 의도적으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태운다”는 등의 기사를 날조하면서 불만을 외집단인 조선인에게 돌리게 된다. “조센징”을 축출하고 학살하는 과정 속에서 집단의 불만은 잠재워질 수 있는 것이다.

대의 명분을 지닌 채 희생하는 자세는 모종의 숭고함을 불러 일으킨다. 즉, 자신은 이기적인 차원에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오직 전체와 집단의 대표자라 여기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집단의 이상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할 때, 갈등의 양상은 보다 첨예화된다. 보다 과격하고 냉혹한 형태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개인적 요소가 있을 때는 가까운 친교 관계, 혹은 인정에 의한 조정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이 집단의 규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일 때, 대의 명분을 위해서는 이러한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계 곳곳에서 혁명은 발생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 앞에 부르주아 및 자본가는 예전의 개인적 관계가 무시된 채 죽어가거나 재산을 빼앗겼다. 이러한 엄격한 이념적 노선의 경우, 이런 상황은 더욱 극명하다. 갈등의 객관화는, 즉 당사자 모두가 과학적 믿음을 갖고 동일한 목적을 추구할 때, 한 집단에 대한 통합적 요소로 기능할 수 있다.

분단 상황에 직면했던 한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한국전쟁은 야만의 시대라 부를 만했다. 친구였던 자가 완장을 차고 나타나 자신의 가족을 학살한 경우가 부지기수며, 이는 이범선의 <학마을 사람들>과 같은 분단 문학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의명분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라지며 원리와 원칙만이 남게 된다. 이를 통해 한 집단은 더더욱 단결할 수 있으며, 외집단은 증오심을 키울 수밖에 없다.

짐멜은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조직이 유리하므로, 각 당사자는 적대자가 통일성을 결여하기를 강렬히 바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저는 이는 언제나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양 집단 간에 상대적 세력 균형이 있다면, 통일된 당사자는 역시 통일된 적대자를 좋아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은 고용주 개개인보다 고용주의 결사체와 상대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또한 고용주 역시 자율적인 구성원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노동 조직과 상대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저의 이러한 주장은 선진 산업사회에서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은 가운데서 생겨났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정합성을 찾기는 힘들다. 여전히 한국의 고용주의 대부분은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있으며, 심지어 중소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서면이 아닌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통보 받고 있다. “적의 산만한 군중과 대항해서, 사람들은 따로 따로의 승리는 보다 자주 얻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다음에 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자리잡게 해 주는 결정적인 결과에는 거의 도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코저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잃게 만든다. 한국의 고용주, 그리고 정부의 최대 목적은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도록, 모래알처럼 산산히 흩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통해서 노동자의 단결을 방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노동계의 분열로 이어지면서 일정 부분 성공을 이루고 있다. 즉, “귀족 노조” 대 비정규직 노조의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한 집단의 투쟁과 연합은 외집단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를 살펴보자. 이들은 “근무 태만”으로 문자 해고를 당했고, 지난 몇 년 간 복직을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해고 사유는 비정규직 노조의 결성이었다. 최저 임금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로 낮은 단가를 유지했던 회사로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조직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결사는 이에 대한 대항을 불러오기 때문에 사회학적으로 중요하다.

투쟁은 원자화된 개인을 모은다. 그 전까지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관심이 없던 “아줌마”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연합과 투쟁 속에서 그들은 개인주의적 사회에 구조를 부여하고, 원자화를 통한 분열을 막는다. 즉, 노동자가 분열되지 않은 채 연합함으로써 사용자의 “횡포”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새로운 결사와 연합, 즉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단체와 정당을 이끌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참여를 보다 활발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특히 갈등은 경시되는 측면이 크다. 경제 살리기의 일환으로서, 정부와 여당은 “사회적 대통합”을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다. 대체 누구를 위한 “사회적 대통합”일까? 약자의 권익을 위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반체제적 행위로 낙인 찍힐 뿐이다. 오로지 정부는 “기업 프렌들리”의 원칙 속에서, 노동자를 탄압하고 권력 엘리트의 이익을 실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득권과 대립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재의 이명박 정부는 일본 관광객까지 폭행하는 초유의 공권력을 반대자들을 향해 투입하고 있다.

진정 “갈등의 사회적 기능”을 안다면,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속담의 뜻을 이해한다면, 갈등이 드러내고 있는 지점, 즉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갈등의 분출을 막는 데만 급급한다면, 정부의 탄압은 전 국민적 저항과 단결을 불러올 것이다. 이미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이미 “촛불 소녀”가 등장했고 초등학생까지 이명박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분명 지난 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체제 비판적인 인사를 연행하고 고문하고 탄압했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서 직선제와 개헌을 이루어냈다. 정부는 그저 갈등을 무마하려고만 했다. 이때 국민은 집단적으로 결속하면서 “현실적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고, 뚜렷한 이상과 목표를 지니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결사와 연합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끊임없이 북한 위협론을 통해 국가적 단결을 외침으로써, 외집단과의 갈등을 통해 내적 응집력을 증대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80년 대에는 마르크스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학생 조직을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은 분신을 서슴지 않는 등의 냉철한 투쟁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따라서 한국의 위정자는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갈등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을 거듭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보다 더 견실한 형태로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by 조명래 | 2009/06/01 01:0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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